1. 말없이 함께 걷기 좋은 ‘섭지코지 바닷길’
제주에 도착하던 날, 어디를 먼저 갈까 고민하다 섭지코지를 선택했어요. 사실 이곳은 관광지로도 많이 알려진 곳이지만, 저는 이 풍경 속에 담긴 조용한 감성이 더 좋더라고요. 바람은 부드럽고 바다는 넓고, 그저 걷기만 해도 속이 다 비워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부모님도 말없이 걷다가 가끔 웃으시고, 바닷가의 들꽃 앞에서 한참 서 계셨죠. 길이 완만해서 무릎이 안 좋으신 아버지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었고, 중간중간 앉을 곳도 많아서 쉬엄쉬엄 다니기 좋았어요.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 시간, 그 침묵 속에 담긴 온기가 아직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여행지에서 꼭 뭔가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걸, 이 길에서 다시 배웠어요.
2. 오래된 기억을 꺼내주는 ‘제주돌문화공원’
두 번째 날엔 조금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제주돌문화공원을 찾았어요. ‘돌’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조금 무뚝뚝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이곳은 정말 따뜻한 공간이더라고요. 부모님은 어릴 적 시골 집을 떠올리셨는지, 돌담을 따라 걸으며 옛날 얘기를 하나 둘 꺼내셨어요. 어린 시절엔 소죽 끓이던 부엌의 연기 냄새가 아직도 기억난다고 하시는데, 저도 덩달아 그 시절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전시를 보고 설명을 들으며 부모님의 삶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됐어요. 한참 걷다가 벤치에 앉아 마주 앉아 계신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니, 그 자체가 참 고마운 풍경이었어요. 복잡한 도심에선 절대 가질 수 없는, 잔잔한 여유가 있는 곳이에요.
3. 따뜻한 국물처럼 마음까지 채워준 ‘제주 고기국수’
제주에서 뭘 먹을까 고민하다, 부모님과 함께라면 부담 없고 속 편한 음식을 고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택한 게 바로 고기국수였습니다. 땐 그저 그랬던 사실 저는 예전에 먹었을 기억이 있었는데, 이번엔 느낌이 달랐어요. 아침부터 뭔가 따뜻한 게 땡겼던 건지, 아니면 부모님과 함께여서인지, 국물 한 숟갈이 속을 확 풀어주는 느낌이었어요. 부모님도 아주 맛있다며, “이 국수 하나면 하루가 든든하다”고 하셨죠. 고기도 부드럽고 간도 세지 않아서, 평소 자극적인 걸 피하시는 어머니도 깔끔하게 한 그릇 드셨고요. 여행 중에 먹는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의 분위기와 함께 기억되는 것 같아요. 따뜻한 국물 속에서 함께 웃고 이야기 나눴던 그 아침,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아요.
4. 자연이 만든 평온함 ‘중산간 한옥 스테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마도 그 숙소였을 거예요. 시내에서 벗어나 제주의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한옥 스테이를 예약했는데요,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고요함이 참 좋았어요. 마당엔 감귤나무가 있고, 방 안에는 따뜻한 온돌이 있어서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저녁엔 어머니와 함께 마당 평상에 앉아 별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아버지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런 데서 며칠 푹 쉬고 싶다”고 하셨어요. 사실 효도여행이라고 해도 특별한 걸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는데, 이 조용한 시간 하나로 모든 게 충분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다음에 또 제주를 찾게 된다면 이 숙소에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가족과 함께하기에 너무나 좋은 공간이었어요.
5. 바람 따라 천천히 걷는 ‘용눈이오름’
마지막 날엔 뭔가 특별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 곳을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택한 곳이 용눈이오름이었죠.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 부모님도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었고, 정상에 서니 사방으로 펼쳐진 초록빛 풍경과 멀리 보이는 바다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장관이었어요. 바람이 참 시원하게 불던 그 순간,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웃으셨어요. 그 모습을 보는 저도 뭉클해졌고요. 정상에서 찍은 가족 사진 한 장이 지금도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남아 있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결국 효도여행이란 어디를 갔는지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소중한 시간이 오롯이 남는 곳, 제주도는 그 역할을 참 잘 해주는 여행지였습니다.